낙서장

사람의 인연(因緣), 하늘의 인연(因緣)...

무흔세상 2011. 3. 10. 08:41

 

토요일 격주 근무로, 모처럼 본가에서 갖는 휴일이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는 하나 계곡의 바람은 벌써 차다.

작정을 하고 나선 길은 아니지만 수어장대까지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


아들놈은 신이 나서 저만큼 앞서서 달린다.

이 녀석아, 산은 그렇게 오르는게 아니란다.

천천히... 꾸준하게 올라가야지 처음부터 그렇게 내달아서야 원...


집에서 남한산성에 오르는 길은...

산성입구에서 계단을 지나 남문쪽으로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길은 도로를 지나기 때문에 번잡스럽고 복잡하여...

한적한 집 뒷산쪽 구길을 택하였다.


길가에 말라 붙은 억새풀꽃이 그 흰머리를 바람에 맡기며 흔들거린다.


계곡에 이르자 아들은 목이 마르단다.

손으로 계곡 물을 움켜 입에 대주자 “아빠 이 물 먹어도 괜찮은 거야?”

하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그래! 수돗물 보다 더 맛이 있을 거야...

계곡물은 여름보다 수량은 줄었으나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속까지 시원하도록 깨끗하다.


하늘이 참 푸르고, 이곳은 공기부터 틀리는구나!...

 

 

“우리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오래전 이 산길을 같이 걷던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난... 대답을 피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이미 자신을 잃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 대답을 기다리던 그녀는...

얕은 한숨과 함께 먼 하늘을 잠시 바라다 보았다.

“미안해! 우리 오늘은 복잡한 생각 없이 그냥 걷자...

우린 너무 오랫만에 만났잖아... 그냥 즐겁게 보내자...”

이렇게 말한 그녀는 의식적으로 더 명랑한 표정을 지었고....


지난 여름 늦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때...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잠시 한번 만날 수 없겠느냐고...

그러나 난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얕은 한숨을 쉬며 돌아섰으리라...

늘 어떻게 지낼까 생각을 했으면서도 난 만남에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내가 널 보내노라고 생가슴을 찢던 그 마음을

이젠 다 거두어 들였는지... 난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내 젊은 날의 모든 열정과 가슴 설레임은 그녀를 보냄으로 끝이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의 하늘도 저렇게 푸르를까?....



- 그대 멀리 있어도 -


그대 내 곁을 떠나 멀리 있어서
굳게 맺은 그 맹서 잊으셨나요
달빛 어리는 물결 출렁이면은
내마음 나도 몰래 설레입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갔어도

잊을 수 없는 일들
내마음 속 깊이 새겨진 그때 그 행복
듣고 싶어요 묻고 싶어요

하고 싶은 말 많아요


그대 내곁을 떠나 멀리 있어도
우리 굳게 맺었던 그 맹서는 잊지 말아요




앞서가던 아들놈의 소리쳐 부름에 현실로 돌아와 달려가 보니,

“아빠 나무위에 생쥐가 있어” 하며 손가락으로 길옆의 상수리 나무를 가리킨다.

“그건 생쥐가 아니라 다람쥐야, 그림책에서 본적 있지?”

“응, 그렇구나” 하는 녀석의 얼굴에도 땀이 흐른다.

“더 갈 수 있겠니?” 하는 내 물음에 “응 난 괜찮아!” 하면서도

표정은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유난히도 아빠를 따르는 녀석...

아마 곧 너의 작은 세계에서도 아빠가 별로 필요 없어 지겠지...

내가 최불암 선생의 흉내라도 내면서

“아들아! 산을 오른다는 건 우리네 인생살이와 비슷하단다.”

어쩌구 얘길해 봐야, 이제 겨우 네살짜리가 어찌 알아 들을 것이며...

그보다 얼마나 재미 없는 짓거리란 말인가?...

난 단지 네 녀석이 일생을 간직할 성정에 이런 산도, 나무도, 다람쥐도

좋아하는 심성이 담겨지기를 바랄 뿐.....


수어장대가 빤히 보이는 곳에 이르자 경사는 한층 더 급해지고

녀석은 기여히 “아빠, 이젠 그만 집에 가면 안돼?” 라고 한다.

난 흔쾌히 그러자고 하며 돌아섰다.

그건 단지 나도 힘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맘 먹은건 꼭 이뤄야만 하고...

이런건 나중에 천천히 배우렴...

지금은 그냥 아이 다우면 그 뿐 아닌가?....

 

 

우주를 이야기할때 키로미터라든가 마일 같은 측정단위는 전혀 쓸모가 없다던가?

워낙 크기가 크기 때문이란다. 그것은 시간을 측정할때도 마찬가지이다.

우주의 나이를 대략 150억년으로, 지구의 나이는 50억년 정도로 추정한다는데...

십년, 백년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동양에서는 겁(劫)이라는 애매모호 하지만

조금은 편리한 시간 단위가 있기도 하다.

그것은 천지가 개벽을 해서 다음에 다시 천지가 개벽을 할때 까지

걸리는 시간을 말한다.

그것은 천년에 한번 떨어지는 낙숫물로

집채만한 바위를 뚫을 정도의 시간이라던가?

천년에 한번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에 스쳐서

사방 사십리의 바위가 다 닳아 없어 질때 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 달리 말하기도 한다.


세상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고

수많은 사람들 중에 부자간으로 만나는건...

일만겁에 한번 있을 인연이라던가?

현세에 나와 이 아이가 부자간으로 만났으니...

앞으로 일만겁이라는 가늠하기 조차 힘든

아득한 시간이 흘러야만, 우린 또 부자간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부부의 인연도 8,000겁의 인연이라던가?

그 옛날의 그녀도 내게 수천겁의 인연은 되리라...

친구로 연인으로 같이 보낸 시간이 6년이면 그 쯤은 되리라...

또 다시 이루어지지 못하고 만다 하더라도

그 정도나마 인연을 그녀와 다시 가지려면...

수천겁의 시간이 흐른후에야 가능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산길 떠메이다시피 품에 안겨 오던 아이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내 소중한 분신, 안은 팔에 힘을 더 줘 본다.


연인이나 부부의 인연이 사람의 인연이라면...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은 분명히 하늘의 인연이다.

결국은 사람의 인연이 하늘의 인연을 창조한 셈인가?...

아니다, 하늘이 자신의 인연을 위해 사람의 인연에 까지 손길을 보냈으리라...

이루지 못한 옛날의 그녀도, 내 소중한 아들도 결국은 하늘의 인연이리라...



짧은 가을해는 벌써 저물어 가고 있었다.

 

 

-1997년 11월 어느날 무흔의 가을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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