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나는 아직도 철부지...

무흔세상 2010. 2. 5. 13:19

퇴근 시간 무렵에 한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불량소녀(이하 그녀)의 목소리였습니다

오늘따라 목소리가 착 가라 앉고 나직 했으며 말꼬리가 짧았습니다.

 

나야...”

그녀의 이런 어투는 곧바로 심각성을 예고합니다.

웬일이여, 전화를 다 하구

끝나는 대루 집으로 곧장 와

그녀는 쓰다 달다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퇴근을 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현관을 들어 서기 무섭게 그녀가 불쑥 제게 뭔가를 내밀었습니다.

 

이게 뭐여?”

 

나는 그녀가 내민 종이쪽지를 펴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카드 명세서였습니다.

그녀 모르게 비상용으로 만들어 놓은 카드였습니다.

 

저도 사람인데 어찌 돈이 필요 하지 않겠습니까?

월급은 고스란히 통장으로 들어가고 아쉬울 때 마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다 보니

여간 자존심이 상하고 귀찮은 게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그녀 몰래 카드 하나를 만들었고 카드 명세서는 직장 사무실에서

받아 볼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사무실에서 카드 명세서를 보고는 무심코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바지를 세탁하기 위해 그녀가 주머니를 뒤지다 카드명세서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문제는 그 카드 명세서에 적힌 내용이였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당신, 이게 뭐여?”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분명히 xx여성복이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그녀가 재차 묻습니다.

당신, 나 모르게 어디 여자 읃어 놨어?”

뭔 소리여. 여자라니...”

그럼. 이 여자 옷 가게 이름은 뭐여?”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그녀가 재차 채근을 해 댑니다.“

어서 얘기 해봐. 여자 옷 사서 누굴 준 겨...”

그게 아녀...”

아님 뭐여. 나는 여적지 당신이 사 준 그 흔한 빤쓰 쪼가리 하나 못 얻어 입은 사람이여.

도대체 어떤 년 한데 뭘 사줬느냐 말이여.“

 

그녀의 닥달에 코를 닷발이나 빠트리고 앉아 방바닥만 긁적이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랬습니다.

지난해 12월말에 경기 동부권에 사는 고교동기 셋이서 송년회를 했습니다.

간단하게 소주나 몇 잔 마시기로 했는데 술이 취하고 보니 그게 또 맘대로

되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는 술값을 서로 나누어 내기로 하고는 호기롭게 룸싸롱이라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그 곳은 술값이 만만치 않은 곳이죠.

아가씨들과 어울려 정신없이 술을 마시고 계산을 하려 했는데 술값이 무려

90만원 이나 나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제 카드로 결제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술집에서 세금을 포탈하려 했는지 영수증에 술집 이름이 아닌 의류판매

점으로 돼 있는 겁니다.


의아해 사장이라는 작자한테 물으니 대답이 걸작이였습니다.

 

그게요. 사실 이런 곳에서 약주 드신 것을 사모님이 아시면 어떠시겠어요.

그래서 감춰드리기 위해 그런 거예요. 고객보호 차원에서 이러는 거니까 이해하세요

 

그녀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 하구 살 겨, 안 살 겨.”


묵묵히 방바닥만 보고 있으니 그녀의 목소리가 또 들렸습니다.

 

이제 하다하다 할 게 없어서 기집질까지 하누만.

그래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인지 얘기나 들어봅시다.”

그녀가 다시 종주먹을 대며 달려 듭니다.

 

그게 아니구. 술값이여.”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요새는 옷 파는 데서두 술 파는 가베.”

 

저는 그날 저녁 모든 것을 이실직고 했습니다.

 

제 얘기를 다 듣고 난 그녀가 말했습니다.

당신 제정신이여. 당신 얼마나 번다구 하루저녁에 술값으루

90만원씩이나 쓰는 . 90만원이면 우리 두달 생활비여.

두달 생활비를 하룻저녁에 목구멍으루 넘겨?“ 

 

그녀의 닦달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 이였습니다.

 

그래 어쩔 텨. 그 돈 어떻게 갚을 거냐 그거여.”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당신 나이가 몇이여. 이제 낼모레면 딸내미 대학 등록금도 내야 한다 이거여.

그 나이에 하루저녁에 90만원씩 술 먹는 인간이 사람이여?“

 

저는 그날 저녁 무려 2시간이 넘도록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였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 트리고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이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카드 막는 날이 오늘이더먼

그녀가 뭔가를 제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돈 봉투였습니다.

“90만원이여. 카드는 막아야 할거아녀.” 

 

말 없이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뜨려 했습니다.

이때 그녀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냥 가면 어쪄. 내 놔야지...”

 

그날 아침 저는 애써 만든 신용카드를 그녀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생각지 않았던 돈 60만원이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술값 90만 원중 60만원은 친구들이 내야 할 몫 이였기 때문입니다.

 

주머니에 있는 돈뭉치를 만지며 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공돈 같은 60만원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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