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 무렵에 한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불량소녀(이하 그녀)의 목소리였습니다.
오늘따라 목소리가 착 가라 앉고 나직 했으며 말꼬리가 짧았습니다.
“나야...”
그녀의 이런 어투는 곧바로 심각성을 예고합니다.
“웬일이여, 전화를 다 하구”
“끝나는 대루 집으로 곧장 와”
그녀는 쓰다 달다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퇴근을 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현관을 들어 서기 무섭게 그녀가 불쑥 제게 뭔가를 내밀었습니다.
“이게 뭐여?”
나는 그녀가 내민 종이쪽지를 펴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카드 명세서였습니다.
그녀 모르게 비상용으로 만들어 놓은 카드였습니다.
저도 사람인데 어찌 돈이 필요 하지 않겠습니까?
월급은 고스란히 통장으로 들어가고 아쉬울 때 마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다 보니
여간 자존심이 상하고 귀찮은 게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그녀 몰래 카드 하나를 만들었고 카드 명세서는 직장 사무실에서
받아 볼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사무실에서 카드 명세서를 보고는 무심코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바지를 세탁하기 위해 그녀가 주머니를 뒤지다 카드명세서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문제는 그 카드 명세서에 적힌 내용이였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당신, 이게 뭐여?”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분명히 xx여성복이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그녀가 재차 묻습니다.
“당신, 나 모르게 어디 여자 읃어 놨어?”
“뭔 소리여. 여자라니...”
“그럼. 이 여자 옷 가게 이름은 뭐여?”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그녀가 재차 채근을 해 댑니다.“
“어서 얘기 해봐. 여자 옷 사서 누굴 준 겨...”
“그게 아녀...”
“아님 뭐여. 나는 여적지 당신이 사 준 그 흔한 빤쓰 쪼가리 하나 못 얻어 입은 사람이여.
도대체 어떤 년 한데 뭘 사줬느냐 말이여.“
그녀의 닥달에 코를 닷발이나 빠트리고 앉아 방바닥만 긁적이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랬습니다.
지난해 12월말에 경기 동부권에 사는 고교동기 셋이서 송년회를 했습니다.
간단하게 소주나 몇 잔 마시기로 했는데 술이 취하고 보니 그게 또 맘대로
되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는 술값을 서로 나누어 내기로 하고는 호기롭게 룸싸롱이라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그 곳은 술값이 만만치 않은 곳이죠.
아가씨들과 어울려 정신없이 술을 마시고 계산을 하려 했는데 술값이 무려
90만원 이나 나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제 카드로 결제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술집에서 세금을 포탈하려 했는지 영수증에 술집 이름이 아닌 의류판매
점으로 돼 있는 겁니다.
의아해 사장이라는 작자한테 물으니 대답이 걸작이였습니다.
“그게요. 사실 이런 곳에서 약주 드신 것을 사모님이 아시면 어떠시겠어요.
그래서 감춰드리기 위해 그런 거예요. 고객보호 차원에서 이러는 거니까 이해하세요“
그녀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 하구 살 겨, 안 살 겨.”
묵묵히 방바닥만 보고 있으니 그녀의 목소리가 또 들렸습니다.
“이제 하다하다 할 게 없어서 기집질까지 하누만.
그래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년인지 얘기나 들어봅시다.”
그녀가 다시 종주먹을 대며 달려 듭니다.
“그게 아니구. 술값이여.”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요새는 옷 파는 데서두 술 파는 가베.”
저는 그날 저녁 모든 것을 이실직고 했습니다.
제 얘기를 다 듣고 난 그녀가 말했습니다.
“당신 제정신이여. 당신 얼마나 번다구 하루저녁에 술값으루
90만원씩이나 쓰는 겨. 90만원이면 우리 두달 생활비여.
두달 생활비를 하룻저녁에 목구멍으루 넘겨?“
그녀의 닦달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 이였습니다.
“그래 어쩔 텨. 그 돈 어떻게 갚을 거냐 그거여.”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당신 나이가 몇이여. 이제 낼모레면 딸내미 대학 등록금도 내야 한다 이거여.
그 나이에 하루저녁에 90만원씩 술 먹는 인간이 사람이여?“
저는 그날 저녁 무려 2시간이 넘도록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였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 트리고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이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카드 막는 날이 오늘이더먼”
그녀가 뭔가를 제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돈 봉투였습니다.
“90만원이여. 카드는 막아야 할거아녀.”
말 없이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뜨려 했습니다.
이때 그녀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냥 가면 어쪄. 내 놔야지...”
그날 아침 저는 애써 만든 신용카드를 그녀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생각지 않았던 돈 60만원이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술값 90만 원중 60만원은 친구들이 내야 할 몫 이였기 때문입니다.
주머니에 있는 돈뭉치를 만지며 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공돈 같은 60만원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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