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은밀한 거래의 휴유증...

무흔세상 2009. 12. 24. 14:06

살을 빼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

요새 좀 독하게 다이어트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녁식사를 조심하라는 다이어트계의 철칙을 새겨 들으며

저녁은 평소에 비해 거의 굶다시피합니다.

 

불량소녀(이라 그녀)가 저녁이다 하며 내놓는 음식은

무슨 콩가루인지 쌀가루인지를 모를

잡곡을 한꺼번에 버무려 갈아만든 가루를 (이른바 선식이라 불리어 지는)

물에다 타먹으면 그게 저녁 식사 끝인게지요.

사람이 가지는 욕구의 결핍 중에

먹는 욕구에의 결핍만큼 비참한게 또 있으랴

하는게 요즘 터특한 내 개똥 철학의 한 자락입니다.

 

하여간 이렇게 한 보름간을 먹으며 지내고 있는데,

그러면 내 몰꼴은 피골이 상접해지거나,

인격으로 불리워지던 내 뱃살에 무슨 변화가 와야 되는데

그렇지도 않으니, 이게 무슨 조환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독한 다이어트에 돌입중인지라

어제는 현장에서 측량성과를 검사하고

저녁을 먹고 가자는 일행을 뿌리치고

그 잘난 선식을 그리며 주린 배를 부여잡고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집에 거의 도달할 무렵 그녀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집으로 오기 전에 학원에서 끝날 딸레미를 좀 픽업해 오라는 분부였습니다.

 

"배고파 죽겠는데...." 라 궁시렁 거리며 감히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딸레미가 다니는 학원 앞 도로 변에 차를 갖다 대고 딸레미를 기다렸지요.

차를 대고 나서 주위를 보니 저만치에서,

트럭에서 순대 떡볶이 오뎅 등등을 파는 이동 가게가 떡하니 버티며

그윽하게 유혹하고 있는 겁니다.

 

김이 모락 모락 나는 순대하며 벌겋게 달구어져 너무나도 섹시한 떡볶이,

그리고 하얀 나신이 그대로 드러난듯한 오뎅 그리고 뜨끈뜨끈한 국물....

처음엔 지긋이 눈을 감고 못본체 했으나 그 유혹은 내겐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그리고 치명적인 유혹일 수 밖에요.

 

마치 김유신장군의 애마가

그가 조는 사이 애첩의 집으로 인도를 했다는 고사처럼

내 발은 마치 최면에 걸린듯 그 트럭 가게로 가고 말았습니다.

마침 딸레미가 오기까지엔 넉넉한 시간이 남았더군요.

먹고 나서 입 닦고 근엄하게 뒷짐지고 있으면 완전 범죄가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확고한 사실이었습니다.

 

거기다 주인 아줌마는 넉넉한 체형에 편안한 미소를 가진

중년의 아주머니였습니다.

내가 먹어 주는 것이 이 추운 겨울 밤에 안스럽게 영업을 하는

저 아주머니를 위한 보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생각하고 떡볶이 딱 일인분만 먹자 라는 생각하게 됐습니다.

 

결심을 굳히고 떡볶이 일인분을 주문하니

아주머니 몸집만큼이나 넉넉하게 그릇에 담아 줍니다.

먹다 보니 목이 마르더군요.

해서 오뎅을 먹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세개가 개눈 감추듯 사라지고 말더군요.

그런데 김이 슬슬 피어 오르는 따끈한 순대에의 유혹은 또 얼마나 강렬하던지요.

해서 "아줌마? 순대 처넌어치도 주능교?" 하니

 "양이 좀 적을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푸짐하게 담아 줍니다.

마지막으로 오뎅 두개를 더 추가해 먹으니

절로 트림이 나며 좀 살 것 같더군요.

그리고 디저트로 오뎅 국물을 품위 있게 두컵을 더 먹고나니

포만감에 절로 행복에 겨워 세상이 다 아름답게 보이더군요.

 

입을 싹 닦고 차에 돌아가 좀 기다리는데

마침 딸레미는 평소보다 좀 늦습니다.

그러니 배고파 죽겠다는 나의 측은한 표정과 연기도 좀 더 리얼해지겠지요.

결국 아빠의 완벽한 오리발에 딸레미도 속고야 말겁니다.

 

드디어 딸레미가 저기서 걸어오는데

어째 걸어 오는 폼이 평소와는 좀 다릅니다.

뭔가를 들고 오는데 여간 조심스럽게 걸어 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떡복이에 순대 거기다가 오뎅과 국물까지....

바리바리하게 알뜰하게 그리고 푸짐하게도 샀습니다.

 

"아니 이게 뭐냐?" 하니, 아빠가 이맘때 하도 배고파 해서

가진 용돈을 다 털어 아빠가 좋아하는 걸로만 샀다는 겁니다.

엄마에게 얘기 안할테니 차에서 다 먹고 가야한다며

마치 은밀한 거래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에 홍조도 띠면서 말입니다.

 

딸레미는 무슨 은밀한 거래의 공범이나 되는냥

음식을 조심스럽게 펼쳐놓는데

이거 안먹거나 거부하면 울음을 터트리고 말겝니다.

또 자기는 저녁을 푸짐하게 먹었으니 배가 하나도 안고프니

나만 맘껏 드시랍니다.

 

어제 밤, 나 배터져 죽는 줄 알았다니깐요...

 

2009. 12. 어느날